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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의병장 고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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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1,082회 작성일 11-09-2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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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광순


이칭별칭
자 서백(瑞伯), 호 녹천(鹿川)
초명 광욱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사망
1848∼1907
성격
의병
출신지
담양군 창평(昌平)
본관
장흥

고광순(高光洵)은 조선 말기 고종 임금 때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 지방, 특히 이 고장 구례와 지리산(智異山)에서 일본군을 쳐부수다 숨진 분이다.

그는 담양군 창평(昌平)에서 태어났으며, 자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이라 하였다. 초명은 광욱(光旭) 또는 광순(光珣·光詢). 생부는 정상(鼎相), 양부는 경주(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한 고광순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깨닫고 언제나 이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년 1월 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제량·광훈(光薰)·광채(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그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싸울 때 사용한 태극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굳은 신념을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글자를 태극기에 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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