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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처사(處士) 이건(李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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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1,077회 작성일 11-09-2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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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處士) 이건(李健)

이건(李健)은 독학으로 도학의 심오한 경지에 다달아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處士)로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나 선비보다도 더 존경받는 남원 문화를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이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이건은 1718년(숙종 44)에 태어나 1779년(정조 3) 죽었다. 초명(初名)은 구( )이며, 자(字)는 사이(士以), 호는 경재(敬齋)라 했으며, 필전(必傳), 학전(學傳) 등 아들 둘을 두었고,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聞人)으로 효행이 순지(純至)하고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살았다. 본관은 남원의 토속 성씨의 하나인 영천(寧川) 이씨(李氏)로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영천군(寧川君)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으로 고조(高祖)는 첨추(僉樞) 희량(希良), 증조(曾祖)는 선전관(宣傳官) 흥준(興俊), 조부(祖父)는 시황(時煌), 고는 처무(處武), 외조는 전주(全州) 최씨, 처부는 금성(錦城) 정시원(鄭時元)이다. 본래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영천 이씨 대명공파 집성촌)에서 태어나 나중에 주천면 용담리로 이주해와 살면서 도학과 유학을 몸소 실천하여 그 인물됨이 널리 알려졌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처사(處士)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 독학으로 세상의 이치 깨우쳐

어려서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가 1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독서에 뜻을 두어 대학(大學)을 연구함에 언해(諺解)로 스승을 삼았고, 다음에 경전(經傳), 정주학(程朱學) 등을 스승도 없이 10년의 독학으로 깨우쳐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후 당시 도학의 대가인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 찾아가 평소에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질문하고 문하에 들것을 청하니, 도암은 독학으로 깨우친 이건의 생각이 별로 어긋남이 없거늘, 도암이, "평소 소박하고 착실한 공부를 하였다"며 허락하고, 자신이 편찬한 검신록(檢身錄)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道)의 중요한 점이 모두 이 책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건(李健)의 본래 이름은 구( )였는데 스승 도암이 이름을 건(健)으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스승 도암은 이건의 학문과 사람됨이 하늘(天)과 같다고 하여 주역의 64쾌의 첫 번째인 건(建)과 같은 뜻으로 건(健)이라 부르게 하고 자신과 교류를 갖는 많은 선비들에게 이건을소개를 하여 교류를 갖게 했다고 한다. 이건은 스승 도암을 통해 학식이 높고 시문에 능한 서울의 고관대작들에게 그의 학문과 효행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산은 지리산, 사람은 이건((於山 見方丈, 於人 見李健)

조선조 순조(1801년)때 전라감사 김달순(金達淳)은,

"호남에 와서 산은 지리산을 보았고, 사람은 이건을 보았는데 이건이 한 수 더 높더라"며 '기상풍영 융중산수('沂山風詠 隆中山水)라는 싯구로 이건의 학문과 사람됨에 예(禮)를 표했다고 한다. 이 말은 지리산을 보고 감탄했는데 지리산 보다 더 훌륭한 이건이라는 사람이 있는 남원은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로 바꿔 표현 할 만큼 감탄했다는 말이다. 그 후 전라감사 김달순은 이건의 효행과 인물됨을 임금께 상소하여 그의 차자(次子)인 학전(學傳)에게 장릉(莊陵:단종 묘) 참봉(參奉)을 제수 하였지만 학전 또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 싯구가 집안에 전해오다가 1919년 3월에 이건의 후손인 재희(在喜)라는 사람이 이 싯구를 용담마을 동구 밖 용머리 바위에 새겨 선조 건(健), 필전(必傳), 학전(學傳) 등 3부자(父子)의 유적으로 남겨 놓았다.

- 기상풍영 융중산수(沂上風詠 隆中山水)

전라감사 김달순이 이건의 사람됨에 감탄하여 예(禮)를 표하면서 남겼다는 이 싯구는 이건 한 사람을 예찬했다기 보다는, 이건이란 인물을 배출한 우리 고장 남원의 지리적 환경과 문화적 환경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화의 훌륭함을 옛 선인들은 후세에게 널리 알려주기 위해 용담마을 어귀 용머리 산모퉁이에 음각되어 있다.

기상에 풍영(沂上風詠)이요, 융중에 산수(隆中山水)라.

기상 풍영(沂上風詠)의 기(沂)는 중국의 지명인데 경치가 뛰어나 풍월을 읊기에 알맞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증잠이 말하기를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후에서 바람을 쐬고 시문을 읊는 것이 소원이다. 즉 자연을 벗삼아 정서를 함양하고 시문을 읊어 마음을 밝히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는 데서 연유하는데 산수가 뛰어나 풍월하기에 좋다는 뜻이며, 융중산수(隆中山水)는 제갈공명이 숨어살면서 때를 기다리며 산수를 즐길 때 천하를 얻고자 했던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던 곳이 바로 융중이다.

전라 감사 김달순이 예찬한 용담마을은 보통 마을과는 달리 방향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고 용담천은 동에서 서를 향해 S자를 그리며 마을을 감고 흐른다. 본래의 마을은 신라말기에 김해 김씨들이 용담천 건너편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설을 참작하여 나중에 현재의 마을 터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현재의 마을 터가 주역에서 말하는 완벽한 태극(太極)의 형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용담사가 이 마을에 창건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용담(龍潭)마을의 지리적 형세(산수)와 이건이란 인물을 알아 본 전라감사 김달순은 이와 같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마을의 산수는 중국에 있다는 기(沂)와 같이 뛰어난 풍광이 있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제갈공명과 같은 이건(李健)이라는 인물이 있어 남원은 지리산과 더불어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고을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는 용담마을과 이건이라는 인물을 통해 남원의 형승과 문화적 바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야에 묻혀 사는 처사(處士)가 이럴 진데 남원의 인물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기상풍영(沂上風詠) 융중산수(隆中山水)라는 싯구는 단순히 영천 이씨 가문만의 것이 아니라 남원사람들의 기상과 남원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과 역사와 문화를 함축한 말로 문화의 발상지요 중심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다.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싯구를 남원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꾸고 보존해야 하며 남원을 표현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삼아 널리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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