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투사 황찬서(黃贊西) > 남원

본문 바로가기

남원

인물 독립 투사 황찬서(黃贊西)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1,226회 작성일 11-09-21 21:08

본문

독립 투사 황찬서(黃贊西)

일제강점기에 전라북도 남원 일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독립운동가. 1873년(고종 10)∼1919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황찬서(黃贊瑞)이다. 시위 도중 적탄에 맞아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 사후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와 항일 활동

황찬서는 1873년 3월 30일 남원시 왕정동 532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여 행동 또한 남달랐다. 그의 나이 이십여세를 전후하여 남원 땅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터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자작농도 되고 지주도 되어 잘 사는데 우리 주민들은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항상 못마땅하였는데, 그는 항상 울안에 도둑을 키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항일투지가 강했으며,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이 맺어지자 집안 일을 내팽개치고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에 일관해왔다. 그는 동회나 황씨 종친회 등 주민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찾아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 한민족으로 하여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했다. 그 무렵 일제의 야욕을 눈치챈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는데, 항일의병장 양한규와 창의대장(倡義大將) 최익현(崔益鉉) 등이 순창 등지에서 의거(義擧)하자 그는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의사들의 애국심을 극구 찬양했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 십 여명이 모여있었다. 당시 남원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팔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보는 물건에 호기심을 느낀 주민들이 그 상점에서 물건을 살라치면 황찬서는,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의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 한다' 며 가로막고 나서는 등 일인들의 장사를 방해하는 행위가 잦아지자 일인들과의 충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광한루에 주둔하던 왜병들이 싸움을 가로막고 나서 일본인들을 보호하였다. 황찬서 나이 서른 일곱때 한일합방이 되었는데,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고감하게 항일 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나름대로의 투쟁계획을 세웠다.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인에게 돈 안꾸어 쓰기 등은 진작부터 벌여왔던 터이지만, 이번에는 그와 더불어 세금 안내기 운동과 일본인에게 땅 안 팔기 운동을 벌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고 토지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선동했다.

"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누구를 위해 세금으로 바치느냐, 우리가 세금을 내면 일본인 들이 더 잘살게 되고 그만큼 우리의 독립은 늦어지게 됩니다"

" 우리의 토지를 팔아 넘기다가는 언젠가 알거지가 될 것입니다. 형편이 곤란하여 땅을 팔더라도 왜놈에게는 팔지 맙시다. "

이런 식으로 하여 다 이루어진 흥정을 깨놓곤 하자 일인들에게는 황찬서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때마다 일인들은 황찬서를 일본 헌병대에 고발하였고, 일본 헌병대는 그를 체포하여 갖은 고문과 회유책을 썼지만 황찬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아 1912년 10월 5일과 1913년 6월 13일 2차례에 걸쳐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 남원읍 만세운동에서 순절

1919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만행에 궐기한 기미 독립만세운동의 해였다. 남원지방에서도 천도교 교구장 유태홍을 비롯하여 유태홍의 친아들 유석과 김성재, 최병현 등 뜻 있는 인사들을 모아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황찬서는 1919년 4월 4일 새벽에 각 마을의 대표인 청년 중 강병권, 김기택, 황극중, 조경일, 방극용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오후 2시에 남원성안 시장(지금의 동충동 남원 의료원 자리)과 광한루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부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각자 주민들을 많이 모이도록 지시하고 이미 제작된 태극기와 독립선

언문을 나누어주었다.

당시 남원장(南原場)은 순창과 임실, 전남 곡성 등지에 인접한 물자(物資)가 집중되던 곳으로 전남북에서 거래량이 가장 많은 장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황찬서 등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의 계획은 순식간에 각 마을로 번져나갔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주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군중들은 광한루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2시가 가까워지자 군중의 수는 1천 여명에 달했다. 황찬서 등은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군중들이 대쪽이 갈라지는 기세로 환호성을 지르며 시가지로 내달렸다. 남원읍내는 삽시간에 태극기의 물결과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들끓어 올랐다. 일본의 헌병대와 수비대는 밀려드는 인파를 감당할 수가 없게되자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난사를 가했다. 이때 방극용, 김홍록, 방양규, 박재길, 방제환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를 본 황찬서는 소금가마니가 쌓여있는 위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집중사격을 하고있는 왜경 수비대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격투를 할 때 옆에 있던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전주 자혜병원에 입원하였으나 9일만인 4월 12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거사에 참여했던 동지 김기택, 조경인, 이종권 등이 주선하여 황찬서의 장례를 동민장(洞民葬)으로 치뤘다. 현재 유족으로는 인간문화재 백동연죽장 황영보씨가 있다. 1977년 12월 대통령표창이,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국립순천대학교지리산권문화연구원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한국통신로 142-24 T. 061-750-6343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로 255 E2 기초교육관 T. 061-750-5440
Copyright © 국립순천대학교지리산권문화연구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