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태수 (文泰洙, 1880~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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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文泰洙, 1880~1913)
유형 | 인물 | 이칭별칭 | 본명 태현(泰鉉). 별명 태서(泰西). |
시대 | 구한말 | 출생-사망 | 1880년(고종 17)∼1913년 |
성격 | 의병장 | 출신지 |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 |
본관 |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 |
경남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의병장. 영남·호남·호서, 경남서부 일대에서 활약했다.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본관 창원(昌原). 본명 태현(泰鉉). 별명 태서(泰西).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담대했으며 25세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수련을 하였고 1908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하산하였다. 이 해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약하였다. 양주(楊州)에서 13도창의군(13도 연합의병)이 형성될 때 호남의병대장으로 참가하였다. 일본의 헌병대를 습격하고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항쟁하다 1912년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 당하였다.
의재 문태서는 우리나라가 왜국의 야욕에 짓밟히어 국운이 쓰러져가던 구한말(舊韓末), 의병을 모아 덕유산을 중심으로 무려 6년 간에 걸쳐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해서 왜적을 공격하며 투쟁한 의병장이다. 그는 왜군을 기습하고 혹은 유인하여 수없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면서도 그 이름이 크게 들어나지 않은 것은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의 접경지역 깊은 산 속에 근거지를 두고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등 4개 도를 넘나들며 투쟁했기 때문에 그 전과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분산되어서 오히려 축소되어 나타났다고 하겠다. 둘째는 장군이 겸손해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지 않았고 또 왜적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써가며 고향과 신분도 감추고 활동했기 때문에 지휘장 불명에 묻혀있는 사건들이 많았던 것이다.
셋째는 벼슬아치나 저명한 선비, 혹은 호족이었다면 그를 영웅시하고 크게 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민이나 천민은 무시하고 천시하여 그들의 활동이나 업적은 무시했던 시대의 상민계층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지배계급에서 그의 항전을 비하(卑下)하고 애써 축소하려 했으며 왜군들은 의군진에 정보가 어두워 자신들을 공격한 의병진의 지휘자가 누구인지 거의 몰랐던 관계로 그들의 보고문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의 행적을 바로 알고 묻혀있는 사실을 찾아내어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 그의 사상과 정신과 활동을 깊이 연구하고 배워야 할 때라 하겠다. 물론 그는 무력투쟁도 혁혁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재(義齋)의 올곧은 정신이다. 우국충정의 거룩한 정신이나 애민휼민의 정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는 겸허한 자세 등 그의 사상이나 정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의재가 손수 쓴 격문(檄文) 내용을 보거나 무주인들이 왜적의 횡포와 굶주림 속에서 생활에 허덕이면서도 송덕비(頌德碑)를 세운 사실을 볼 때 그의 사상과 활동여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의병항전에는 민폐가 따르게 마련인데도 그는 의병들을 철저히 교육시켜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하고 걱정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의재는 정신이 올발랐다. 산 속에서 생활하는 의병진으로서는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고 불편한 생활인데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왜인들의 재물을 뺏고 왜군들의 무기를 탈취하고 호족들에게 식량이나 군자금을 헌납 받아 활동하였다. 양민들의 재물을 탈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의 인격과 그의 곧바른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주민들이나 부하들로부터 존경의 경지를 넘어 흠모의 대상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오늘의 사회는 특히 자본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하여 국가관이나 민족의식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공동체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전 인류가 공존해야 하는 사회요 국가라는 사회는 협동해야 하는 사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와 협력하지 않고 국가의식을 망각하고 제 혼자만 결코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의재가 뿌린 핏자국의 행적에서 우리는 애국충정이란 어떤 것이며 사회공존이란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가슴으로 깊이 느끼고 머리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그가 걷고 있었던 길은 방향이 뚜렸했고 목적이 뚜렸했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민족이 왜 망하는지를 깨닫게 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였다.
불굴의 투지와 투쟁정신, 보다 적극적인 공격으로 적에게 선수(先手)를 쳐서 적의 통치력을 교란시킨 것은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아첨과 사대의 비굴한 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애족의 주체의식을 각성시켜 새 시대에 눈을 뜨게 하였다. 계급타파와 근대화의 사고력을 확장시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상에 불을 붙여주었다.
부정과 부패와 죄악과 모순된 사회 속에서 참과 거짓을 혼돈하고 대립과 충돌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일침을 놓아주었다. 그러한 길을 단호히 배격하고 구국의 바른 길을 걸어가야 아름답고 살기 좋은 국가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양심을 건지고 애국애족을 위해 장군이 걸었던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의재는 자신과 가정을 버리고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였고 민족을 위해 가족과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활동을 정리하면,
첫째 왜군의 마을 양민들에 대한 보복을 염려하여 마을에서 잡은 왜병들이라도 마을 밖으로 끌어내어 사살하였다.
둘째 재물 탈취 등 양민을 괴롭힌 의병이나 도적을 엄격한 군률로 다스려 사살하기까지 하면서 양민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하였던 것이다.
셋째 군량미나 군수물자 등을 보급하는데는 지방 호족들에게서 헌납을 받거나 왜인, 친일파, 세무서, 관청을 탈취하여 충당하였다.
넷째 마을의 주막들은 연락처나 정보수집의 근거지로 활용하여 왜군들의 동태를 조기에 파악하여 작전계획을 세워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다섯째 대부대이지만 군사조직을 분진과 합진으로 편성하여 전투의 대소에 따라 활용해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섯째 금강산에서 2년 동안 병법과 전술을 배우고 깊이 연구하여 추종불허의 전술로 민첩하고 지혜로운 활동을 하였다.
일곱째 투쟁활동 중인데도 1908년 4월 무주군민들이 장군에 대한 송덕비를 세워 준 것은 의병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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