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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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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706회 작성일 11-08-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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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로 가계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健中), 호는 남명(南冥).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이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한 후, 1531년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45세 때 고향 삼가현(三嘉縣)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1552년(명종 7) 전생서주부에 천거된 후 이듬해 예빈시주부, 1555년 단성현감, 1566년 상서원판관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명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당대에 높은 식견을 가진 오건(吳健)·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에는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68년 올바른 정치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의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조가 즉위해서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진주에 머물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식은 당대의 거유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룬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가 자주 일어나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두 차례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수기치인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적 의미를 보다 강조하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초학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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