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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유적 단속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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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819회 작성일 11-07-2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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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단속사지> - 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른 불교의 흥망성쇄

1. 단속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단속사는 절의 규모가 커 단속사로 가는 길 옆 냇물이 쌀 씻는 물로 인해 강가의 물들이 흰물로 변했다는 전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사찰에 탑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곳은 드무나, 탑과 탑 사이의 거리가 단속사의 경우 제법 떨어져 있어, 그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단속사지에 현존하는 “동 삼층석탑”과 “서 삼층석탑만”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2. 단속사의 창건과 발전

단속사(斷俗寺)가 창건된 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748년(경덕왕 7년)에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763년(경덕왕 22년)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신라는 화엄종 주축의 신라 왕실불교가 흥행하였으나, 왕명에 의해 지어진 단속사는 선종의 노선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지지기반아래 성장하게 된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시대에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단속사는 무신정권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최이는 혜심을 단속사의 주지로 삼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탄 대장경 주조를 위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일환으로 단속사를 거점으로 삼아 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때문에 지방의 절이었던 단속사는 중앙의 선종사원 못지않게 부각되었으며, 이는 몽고침입이후, 지방사회의 중요성이 확대된 사회현상이 불교계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무신정권 말기에는 비실직을 가진 남해안 부근의 재지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후원을 받아 이뤄진 불교결사운동과 관련되어 단속사는 무신정권말기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세속화되었다.

3. 단속사의 시련과 폐사

조선 초, 세종시기까지만 해도 단속사는 주요사원이었다. 이는 1424년, 선종, 교종 각각 18사를 중심으로 설정한 곳에 단속사가 포함되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글을 단서로 주요사원이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유학의 성행과 불교의 억압으로 사찰들은 유학자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변해, 불교는 유교의 부속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단속사의 시련은 1568년 (선조 1년), 성여신이 단속사의 불상과 불경판각에 불을 지름으로써 시작된다. 이는 당시 유학에 비해 약자의 위치에 있던 불교에 저지른 횡포로, 『삼가귀감』이라는 책의 판목순서에 불교가 유교에 앞서 있다는 이유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에 단속사는 유학자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으로 사찰전체가 불타 완전히 폐사되었다. 현재는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과 단속사지서삼층석탑(斷俗寺址西三層石塔)이 남아있고, 그외 사찰의 흔적으로는 터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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