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형왕릉 > 산청

본문 바로가기

산청

유적 전구형왕릉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793회 작성일 11-08-04 22:51

본문

전구형왕릉 (傳仇衡王陵)

철의 왕국 금관가야, 그 최후의 날

지정번호 사적 제 214호

지정연도 1971년 2월 9일

소재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

시대 가야시대

가야는 작은 나라로 알려졌으나, 활발한 국제교역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구축했던 소국이었다. 수로왕의 나라로 항시 신라와 경쟁이 끊이지 않았던 가야는 광개토대왕의 남정이후 급속도로 쇠퇴하여 대가야와 아라가야 중심의 후기가야연맹에 이르게 된다. 그중 금관가야의 멸망은 법흥왕의 신라와의 싸움에서 구형왕과 그 일손들이 신라에 자진 항복하여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가로 진골로서의 지위와 금관가야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다.

1. 구형왕은 누구??

가락국의 제10대 왕(생몰년 미상, 재위 521∼532).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겸지왕(鉗知王)의 아들, 각간(角干) 김무력(金武力)의 아버지,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해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2. 구형왕릉을 둘러싼 두가지 설...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성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3. 구형왕릉은...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왕산 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하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황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2140000,38

오마이뉴스 2009. 12. 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7114

권덕영, 「금관가야 "구형왕릉(仇衡王陵)" 전승과 역사화 과정」,『대구사학』86, 대구사학회, 20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국립순천대학교지리산권문화연구원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한국통신로 142-24 T. 061-750-6343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로 255 E2 기초교육관 T. 061-750-5440
Copyright © 국립순천대학교지리산권문화연구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