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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설화 천은사(泉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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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1,000회 작성일 11-08-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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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泉隱寺)
1) 구렁이와 현판
신라 덕흥왕(德興王) 3년(828) 덕운(德雲)이 창건하였는데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헌강왕(憲康王) 1년(875)년 도선이 중건하였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로 승격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사찰이 불에 타버리자 광해군(光海君) 2년(1610)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중창하였다. 숙종 4년(1679) 조유선사(祖裕禪師)가 중건하였다. 중건할 때에 감로사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자 한 승려가 이를 잡아 죽였더니 그 뒤부터 샘물이 솟아 나오지 않아서 샘이 숨었다고 하여 천은사(泉隱寺)로 절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사찰 이름이 바뀐 뒤 이상하게도 원인을 모를 불이 자주 일어나자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 때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이광사(李匡師)가 수체(水體)로 물 흐르듯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서 수기(水氣)를 불어 넣은 현판을 일주문에 걸게 한 뒤에는 다시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출전 : 구례군의 문화유적

2) 남곡화상(南谷和尙)의 보임(保任)
도(道)란 깨닫기도 어렵지만 깨달은 뒤에 그것을 지켜 나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옛날 남곡 스님이라 하는 분이 지리산 천은사에 살고 있었다. 일찍이 출가하여 한 소식을 얻었다. 소문난 스님으로 늘 실상사(實相寺)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실상사를 갔다가 안팎으로 거의 백리가 넘는 벽소령 (碧少嶺)을 넘어가는데 소금 한 가마니 정도를 짊어진 소금장수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은 높이가 1천 미터가 넘는 곳이라 소금장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 시작하였다. 짐이라는 것은 지고 내려가기도 힘든 것인데 하물며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는 데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남곡 스님은 혼자 같으면 힘이 좋은 분이라 빈 몸으로 설렁설렁 걸어 훌홀 날아올라가겠지만, 소금장수가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애처롭게 올라가는 데야 혼자 그냥 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님은 속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불쌍하게 생각하고 말을 건네었다.
“여보, 영감 짐이 무거우신 것 같은데 내가 좀 지고 갈까요?”
“이 놈의 소금이 팔아봐야 몇 푼어치 되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의 골만 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주신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고맙기는 뭐가 그러 고마울 게 있습니까. 어차피 나는 빈 몸으로 가는 사람인데.”
“그러면 알아서 하시구려.”
하고 영감님이 그만 소금짐을 풀어 놓는다. 스님이 지게를 지자,
“스님 미안합니다.”
“별말씀 다 하십니다. 내가 영감님보다야 나이로 보나 기운으로 보나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핑핑 걸어갔다. 영감님은 발걸음도 가볍게 따라왔다.
얼마쯤 올라가다 보니 남곡이라고 별사람일 수가 없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그렁그렁 하더니 조금 올라가다보니 등에서 빗물 같은 땀이 쏟아졌다. 코에서는 단 냄새가 나고 입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물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무슨 물이 있겠는가. 얼마쯤 더 가야만 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속히 그곳에 가서 물을 마실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그만 돌뿌리에 발가락이 채여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것까지도 좋은데 넘어지는 바람에 소금 가마니가 굴러 떨어져서 언덕배기로 굴러갔다. 그를 본 소금장수가 큰 말로 소리쳤다.
“앗, 저런 변이 있나.”
소금장수의 벼락같은 소리에 넘어졌던 스님은 아픈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소금섬이 걸려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가마니를 챙겨지고 왔다. 소금섬이 풀어져서 약간 흩어졌으므로 그것까지 마저 내려가서 옷자락에 쓸어 담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이 영감 뻑뻑한 말씀 좀 보게,
“여보, 대사. 소금섬이 그만하기 다행이지 아주 쏟아져 버렸더라면 어떡할 뻔하였겠소.”
“미안합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그리되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소금장수 영감은 막무가내였다.
“여보, 대사 잘못하였다고만 하면 그만이오. 소금이 다 쏟아졌더라면 어쩔 뻔했어.”
“소금섬이 아주 터졌다면 큰일 날 뻔했지만 그리되지 아니 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니오.”
“뭐라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남의 물건을 짊어졌으면 조심을 해야 할 일이지, 소금까지 쏟아놓고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어디서 쓰는 거요.”
그렇지만 스님이 생각해 보니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의 소금만 귀한 줄 알았지 사람 중한 것은 도통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 같은 사람이라면 소금은 그만두고 우선 다치지나 않았느냐고 인사를 할 일인데, 그런데 스님 생각과는 아주 딴판으로 또 큰소리를 친다.
“이게 어디서 굴러먹다온 중놈이여, 그래도 변명을 하고 대들어!”
“당신이 대들었지, 내가 대들었소. 나는 미안해서 자꾸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소. 사람이란 혹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겠소. 언제고 잘 한다고만 장담할 수는 없지 않소. 그러나 한번 실수는 병가상사라 너그러이 용서하시오. 짐이나 다시 지고 넘어갑시다.”
그런데 그 영감은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빽빽한 양반은 처음 보았네. 이미 잘못한 것을 아무리 추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재수가 없어서 그리 되었으니 이해하십시오”
“뭐, 이자식이 나보다 빽빽한 양반이라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너 이놈, 맛 좀 보아라.”
하면서 대뜸 주먹을 쥐고 뺨을 후려 갈겼다.
“아이쿠!”
하고 남곡 스님이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볼때기를 쓰다듬으려 하자 소금장수는 아주 화가 난 모습으로 다가서서 이뺨 저뺨을 마구치고 멱살을 잡고 발길로 차고 아무데나 두둘겨 팼다. 남곡 스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우두커니 방어만 하고 섰으니 아주 바보인 줄 알고 이제는 큰 돌멩이를 들어서 머리에 치려고 달려들었다. 스님은 가만히 그의 양손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워낙 기운이 장사라 두 손을 점점 움켜쥐니 돌맹이가 저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남곡 스님이 타일렀다.
“피차 이러다가는 길도 가지 못하고 고생만 할 것 같소.”
“그러면 어떡하자는 거냐?”
“내 손을 놓아라.”
손을 놓으니 그는 두말 하지 않고 소금짐을 걸머지고 씩씩거리면서 고개 길을 올라갔다 남곡 스님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하였다.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로고, 저런 인생과 같이 사는 처자식이 얼마나 따분하고 속이 상할까.”
이렇게 생각을 다지면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따라갔다.
그런데 소금장수는 또 얼마를 올라가지 아니하여서 비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기 시작하였다.
“힘드시죠.”
“힘듭니다.”
“아까는 내가 실수를 하여 소금 짐을 넘어뜨렸으니 이번에는 조심조심하여 져다 드리리다.”
하니 소금장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만 소금짐을 부려놓고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곡 스님은 조금도 불쾌한 마음이 없이 그것을 짊어지고 이제는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발자국에 맞추어 염불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쯤 오다보니 헤어질 곳이 되었다. 지게를 부려놓고,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하니 그 때에야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시오.”
“나는 천은사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도승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만 아직까지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도승을 뵈온 것 같습니다. 미처 내가 속이 없어 스님에게 행패를 부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실수한 것이 잘못이지 영감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스님 같은 도인에게 행패를 부려 다음 과보가 두렵습니다.”
“내가 무슨 도승입니까. 이렇게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도반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힘을 따라 자비를 베풀어라 하셨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마음도 없이 하였으니 뒤에 과보가 올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고 서로 웃는 낯으로 헤어졌다. 그는 집에 와서 처자 권속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나는 오늘 부처님을 보았다. 2천여 년 전 부처님이 인도에 나섰다 하더니 그가 죽어 우리나라에 태어난 듯했다.”
하며 그간의 모든 사정을 말하고 온 가족이 함께 떡과 엿을 빚어 그 스님을 공양코자 천은사를 찾아갔다. 스님은 그때도 똥통을 지고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어허, 소금장수 영감님이 웬일이오.”
하고 반겨 맞아 주자 아내와 남편 한 아들과 두 딸이 길거리에 넙죽이 엎드려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 그를 절로 모셔 크게 공양한 뒤 며칠을 두고 그의 뒷일을 보아주고 떠났다. 그제서야 천은사 스님들도 남곡이 실로 숨은 도인임을 깨달고 큰 스님대접을 하게 되었다 하니,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도 도, 도를 찾는 사람은 많고
도를 행하는 사람은 적도다
도가 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행하는 사람에게 있으니,
사람들아, 도를 입으로 말하기에
앞서 도를 몸으로 행할지니라.
출전 : 불교영험설화(속편)

3) 차일봉 전설(遮日峰, 鐘石臺)
천은사 계곡에 상선암이 있다. 신라 고승 우번 조사가 젊은 시절에 상선암에 찾아가서 10년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절세 미인이 암자에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홀린 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을 망각하고 여인을 뒤따라 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화요차가 만발한 아름다운 수림 속을 지나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 놓칠까봐 산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온데 간 데가 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우번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것이라고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였다. 그러자 관음보살은 간 데가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하여 후일에 도승이 되었다고 한다. 우번 도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우번 도사가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여 이곳을 종석대(鐘石臺)라고 부르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번에 대한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옛날 상선암에 노스님과 사미승이 살았다. 천은사에서 이 암자로 오던 길에 사미승이 남의 조밭에 들어가 조 세 모개를 꺾어왔다. 이를 본 노스님은,
“너는 주인 몰래 남이 애써 가꾼 조를 훔쳤으니 주인집에 가서 삼 년간 일해 그 업보를 해라.”
하고는 사미승을 소로 만들어 놓고 떠나 버렸다. 밭에 왔던 주인이 이 소를 발견했다. 밭에서 쫓아내자 주인을 따라 집까지 왔다. 그런데 이 소는 여느 소와 달리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었고 누런 금빛이 나는 똥을 쌌다. 그 똥이 부려진 곳은 곡식이 잘 되었다. 방광리(放光里)란 마을 이름이 이런 연유가 있다.
삼 년이 지나자 소는 주인에게
“이제 내가 당신 밭에서 진 빚을 다 갚았으니 돌아가겠다.”
고 말하고 사람이 되어 떠났다. 주인이 하도 신기해 뒤따라 가보니 상선암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곳을 ‘사람이 소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으로 우번대(牛翻臺)라 했다는 것이다.

출전 : 구례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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