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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설화 연곡사(鷰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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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1,006회 작성일 11-08-1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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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鷰谷寺)
1) 제비와 연곡사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라 했다고 한다.
절의 연혁을 적고 있는 기록으로는 1924년에 정병덕(鄭秉德)이 집록한 지리산화엄사사적(智異山華嚴寺事蹟) 말미에 기록된 ‘연곡사사적’이 거의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화엄종의 종사(宗師)인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연곡사를 중창한 소요태능(逍遙太能) 역시 연곡사는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시로 읊고 있다. 그러나 543년에 이 지역은 백제 땅에 속하였으므로 이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기록은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한편 최근에 들어와 연기조사는 8세기에 실존하였던 인물로 밝혀졌다. 연기조사는 당시 화엄종과 연관이 깊은 승려로 인접한 화엄사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연곡사는 화엄사의 창건과 연관하여 연기조사에 의해 8세기 무렵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전 : 대한불교조계종

2) 소요대선사(逍遙大禪師) 이야기
대선사의 법명은 태능(太能)이요, 소요(逍遙)는 법호이다. 속성은 오(吳)씨요, 호남 담양사람이다. 명종(明宗) 17년 임술년(1562) 9월 어느 날에 태어났으며, 그 어머니가 어떤 신승(神僧)으로부터 잔 글씨의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나면서부터 피부가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총명함을 나타내었다. 차츰 지각이 생겨남에 따라 탐욕을 멀리하고 도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며 인자한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그 마을에서는 모두 성동이라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으로 놀러갔다가 세상 밖의 경계를 보고 곧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어, 진대사(眞大師)를 의지하여 삭발하고 경율(經律)을 배워 그 뜻을 철저히 밝히셨다. 그때 부휴대사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왕래하며 교화하였으므로 스님은 나아가 화엄경을 배우고 그 오묘한 뜻을 다 얻으셨다.
부휴의 회상(會上)에 수백 명이 있었지만 오직 스님과 운곡충(雲谷沖)과 송월응상(松月應祥)을 일컬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하였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오랑캐를 치고 승리하여 돌아가는 길에 해인사에 머물다가, 대사의 단아함을 보고 부휴대사께
“백락(伯樂)의 마굿간에 뛰어난 말이 많구려.”
라고 하자, 부휴의 여러 제자들이
“태능이야말로 뛰어난 말입니다.”
하였다.
스님은 이전부터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묘향산에서 교화를 펴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서래(西來)의 뜻[西來意]’을 물으셨다. 서산대사는 첫눈에 스님이 법기임을 알아보시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바리(발(鉢)를 전한 다음 3년 동안 지도하였다. 이윽고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자 청중이 그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당시 스님의 나이는 20세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산대사는 스님에게 법게(法偈)를 주셨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
물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 버린다.
우스워라 소를 탄 사람이여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누나.

그 뒤 남방으로 내려와 여러 宗匠(종장)을 찾아 두루 물어보았으나, 그 뜻을 알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묘향산으로 가서 조사께 그 뜻을 물어 비로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마음을 관(觀)하며 성품에 맡겨 거리낌 없이 소요하니 머무는 곳마다 따르는 자가 구름처럼 달려오고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임제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셨다.
임진왜란 때 서산(西山)과 송운(松雲)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아가자, 스님은 불전에 제(齋)를 베풀어 정성껏 그윽한 도움을 빌었으며, 병자년(1636, 인조 14년)에 남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있었을 때에는 나라의 명령을 받들어 서성(西城)을 보완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으니,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서산이나 송운과 같은 길이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스님이 법을 설하는 자리에는 잔나비가 경을 들으며 머리를 숙였고 뱀이 법을 듣고 허물을 벗었으니, 그 교화가 이류(異類)에까지 미침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지리산의 신흥사(新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창건할 때는 조정과 백성이 다 대사의 도화(道化)에 감화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이루었다. 인조 27년(1649) 기축년 11월 21일에, 스님은 열반을 이야기 하다가 붓을 찾아 임종계(臨終偈)를 쓰셨다.

해탈이 해탈 아니거니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劍)의 빛이 번쩍이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을 맞으리.

드디어 열반에 드시니 붉은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고 묘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법랍 88세였다. 다비하는 날 저녁에는 영골(靈骨)이 불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리 2과가 축원에 의해 공중에 솟아올랐으므로, 연곡사, 금산사, 심원사 세 곳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효종대왕은 潛邸(잠저)에 계실 때부터 스님의 도를 듣고 그 고풍을 흠모하였는데, 대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을 듣고 못내 슬퍼하였으며, 4년 후인 임진년(1652) 봄에는 특별히 명하여 慧鑑禪師(혜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실로 특이한 은전(恩典)이다. 또 중사(中使)를 시켜 향과 폐물을 하사하고, 상신(相臣)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셨다. 문집 1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나왔다.
불초 문하의 11세 법손(法孫)인 惠勤(혜근)이 조계산 대학암(大學庵)에서 삼가 쓰노라.
출전 :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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