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귀정사(歸政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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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사(歸政寺)
1) 귀정사 창건설화
맨 처음 절이 세워질 때는 만행사(萬行寺)라 이름하다가 이후 귀정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바뀐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옛날 만행사에는 천하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어 어느덧 이 나라의 왕도 그 이름을 들어 알게 되었다. 그의 설법을 들으면 앉은뱅이도 일어서고, 며칠을 들어도 잠이 아니오며, 몸의 괴로움이 스스로 없어진 다는 소문이 전국에 파다하였다.
이에 왕은 그 고승을 한 번 보기가 소원이다가 하루는 백관을 거느리고 만행사까지 행궁하게 되었는데, 왕이 스님을 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려졌다.
“그대의 설법이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백관을 거느리고 왔으니 불교교리에 대해 가르쳐주어 짐을 즐겁게 해주시오.”
이렇게 하여 스님의 설법이 시작되니 그 오묘한 설법에 듣는 왕과 신하들은 물론이요, 설법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되었다. 이에 왕은 처음에 하루만 머물다 갈 계획을 바꾸었다.
“짐은 이곳에서 3일간 머무르며 국정을 살필 것이니 백관들은 이에 따르되 잠시나마 국정 집행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오.”
이처럼 왕이 3일간을 머물러 만행사에서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이로부터 사찰이름을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에서 왕이 3일간 머물고 나니 주위의 산이름과 지명도 따라서 바뀌게 되었는데, 만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황봉(天皇峰)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밑 여러 줄기 봉우리들도 태자봉(太子峰)ㆍ승상봉(丞相峰)으로 고쳐졌다.
또한 귀정사가 있는 대상리 마을에서 산동면 소재지로 가는 중간에 당동(唐洞)과 요동(堯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지명은 3일간의 귀정사 왕정이 요순시절과 같이 살기 좋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2) 귀정사 이름에 얽힌 전설
처음에는 만행사였던 절 이름이 지금처럼 귀정사로 바뀐 까닭에 대한 이야기이다. 곧 창건 후 어느 때인가 이 절에 있는 고승의 설법을 듣고 싶어 왕이 직접 행차했다가, 그 오묘한 설법에 취해 나랏일을 잊고 3일간이나 절에 머무르다가 3일 뒤에야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설화인데, 이것은 그 만큼 이 절에 고승대덕이 많이 주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왕이 왔다간 이 일로 인해 절 부근의 지명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는 만행산이던 절 뒤의 산이름도 천황봉(天皇峰)으로 바뀐 것을 비롯해서, 주위의 여러 봉우리들도 태자봉(太子峰)·승상봉(丞相峰)·남대문로(南大門路)·둔병치(屯兵峙)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절이 자리한 대상리 마을에서 산동면으로 가는 길목에 당동(唐洞)과 요동(堯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 역시 왕이 3일간 법문을 듣고 간 뒤 나랏일을 잘 보살펴 이후로 중국의 요순시대처럼 살기 좋게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귀정사 사찰에 숨겨놓은 목재와 기와
순조 때 노현일 대사가 지은 대웅전을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1942년에 주지 배정순 스님이 보수하려고 할 때였다. 상량나무 벽 틈새에서 색다른 종이가 나왔는데,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귀정사 경내 여러 불전을 새로 세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재목을 대웅전 안에 저장하였고, 또 여러 불전 지붕을 덮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기와가 사찰 경내에 숨겨져 있으니, 후래 주지는 이를 찾아 모든 불전을 골고루 갖추어 세우도록 하라.”
주지스님은 신기한 나머지 그 기록에 따라 대웅전 천장 위를 올라가 살피니, 과연 그곳에는 크고 작은 목재가 빽빽이 쌓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단청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고 토끼ㆍ사자ㆍ연꽃ㆍ봉황새ㆍ용틀 따위도 곱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가져다 맞추기만 하면 훌륭한 절이 금방 될 만하였다. 천장에서 내려와 마루 밑을 살펴보니 이곳에도 작은 목재가 빈틈없이 저장되어 있는데, 습기 때문에 나무가 삭아서 힘이 없었다. 천장 위의 것은 금새 다듬어 놓은 것처럼 싱싱한데 마루 밑에 있는 것은 풍화작용을 입어 폐물이 되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이 신기한 소식을 마을에 알리자, 이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노현일 대사가 남겨놓은 재목은 6·25 때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유엔군이 사찰을 불태움으로써 써보지도 못한 채 함께 불타고 말았다. 재목은 대웅전 천장과 마루에서 쉽게 발견하였으나 경내에 숨겨 놓았다는 기와는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4) 대웅전을 옮겨 지은 이야기
귀정사의 전성 시기 불당은 만행산 일대를 메웠고 승려 수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상리 일대의 전답이나 임야는 모두가 귀정사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물자가 풍부하여 거두어들인 쌀은 그 해에 못 다먹고, 묵히므로 해마다 묵은 쌀이 늘어나 저장할 곳이 없었다. 승려들의 양식은 언제나 묵은 쌀부터 먹기 마련이어서 귀정사 승려들은 아예 새 쌀 구경을 못했다 한다.
쌀이 오래되면 거기에서 벌레가 생기게 마련이다. 쌀을 씻은 흰 뜬물이 냇물을 덮어 10리 밖 요천강까지 허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귀정사에는 돈도 많아서 돈 꾸러미가 짚가리만치 쌓여 있었으며 쓰지 않은 돈은 녹이 슬어 귀정사에서 나온 돈을 받아갈 사람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귀정사의 승려들은 해묵은 쌀과 녹쓴 돈으로 인하여 모이면 한숨을 지었다.
승려들이 이것을 걱정 할 때 어느 날 낯선 도사가 나타나 ‘대웅전을 뜰 아래로 한단만 내려지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승려들은 도사의 말씀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리하여 대웅전을 옮겨지었는데 몇 년 뒤 묵은 쌀은 차츰 줄어들고 새 쌀을 먹게 되었으며, 돈은 누구에게 도둑맞은 것도 아닌데 차츰 줄어들어 용돈도 궁할 지경에 이르렀다.
5) 귀정사의 삼일왕정
귀정사는 산동면 대상리에 있으며 일찍이 삼국시대 백제 무녕왕 15년(515)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정사는 처음에 만행사라고 하였는데, 이 만행사에는 천하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어 임금까지도 그 이름을 들어 알게 되었다. 당시 소문에 그 고승의 설법을 들으면 앉은뱅이가 일어선다 하고, 며칠을 들어도 잠이 아니 온다 하고 몸의 괴로움이 스스로 없어진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를 거느리고 만행사까지 행궁하게 되었다. 고승을 대하고 왕은
“그대의 설법이 고명함을 듣고 백관을 거느리어 왔으니 불교교리에 대하여 가르쳐 주어 집을 즐겁게 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행사 스님의 설법이 시작되었는데 그 오묘한 설법을 듣는 임금은 물론이요, 누구나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설법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임금은 고승의 설법을 하루라도 더 듣고 싶어서
“짐은 이곳에서 3일간 머물러 국정을 살필 것이니 백관들은 일에 따르되 잠시나마 서정집행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오.”
하였다. 이로부터 왕이 3일간 머무르다 돌아갔다고 하여 ‘귀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금은 그 고승의 설법에 깊이 감동한 나머지
“생지 살지를 아사 동지하리라.”
고 탄성을 발했는데 이 말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 뜻이니 그 정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절이 왕의 3일간 행재소가 되니 주위의 산 이름과 지명도 바뀌었으니, 과거의 만행산을 천황봉이라 하고 그 밑에 좌우 여러 줄기 봉우리를 태자봉, 남대문로,(남대문로: 보절면으로 넘어가는 길) 둔병치(둔병치: 보절면 가는 고개)가 있고, 또 대상리에서 산동면 소재지로 가는 중간에 당동과 요동이란 마을이 있는 바 이것은 3일간의 귀정사 왕정이 요순 세계와 같이 살기가 좋았다 하여 이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귀정사엔 이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조선 순조 때 노현일대사가 지은 대웅전을 그로부터 약 40년 귀인 서기 1942년 때의 주지 변정순 스님이 보수하려 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 때의 상량 나무 벽 틈새에서 색다른 종이가 나왔는데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귀정사 경내 여러 불전을 새로 세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재목을 대웅전 안에 저장하였으며, 또 여러 불전 지붕을 덮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기와가 사찰 경내에 숨겨져 있으니 후래 주지는 이를 찾아 모든 불전을 골로루 갖추어 세우라.”
하는 내용이었다.
배정순 주지는 신기한 나머지 그 기록에 따라 대웅전 천정 위에 올라가 살피니 과연 그 곳엔 크고 작은 목재가 빽빽하게 쌓여 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단청도 말끔히 되어 있고, 토기, 사자, 연꽃, 봉황새, 용틀 따위도 곱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가져다 맞추기만 하면 훌륭한 절이 금세 될 만하였다. 그는 다시 천정에서 내려와 마루장 밑을 살펴보니 이곳에도 크고 작은 목재가 빈틈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목재는 습기로 말미암아 썩어서 재목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배정순 주지는 신기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을 안 서당에 그 이야기를 퍼트렸더니 구경꾼들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귀정사는 6.25동란 때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유엔군이 불태웠는데 순조 때 노현일 대사가 남겨놓은 재목은 써보지도 못한 채 다 타버렸다. 재목은 대웅전 천정 안에 있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경내에 숨겨 놓았다는 기와는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배정순 주지는 물론이요, 그 후임 조희명 주지도 이 기와를 찾으려 애태웠으며, 그 뒤 주지 유남파도 찾고자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만행산 사찰 경내 땅 속을 뒤지긴 전에는 알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전설은 다음과 같다. 귀정사의 전성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생각된다. 이 무렵 불당은 만행산 일대를 메웠고 승려 수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상리 일대의 전답이나 임야는 모두가 귀정사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물자가 풍부하여 오히려 귀찮을 정도였다. 거두어들인 쌀은 그 해에 못다먹고, 묵히므로 해마다 묵은 쌀이 늘어나 저장할 곳이 없었다. 승려들의 양식은 언제나 묵은 쌀부터 먹기 마련이어서 귀정사 승려들은 아예 새 쌀 구경을 못했다 한다.
쌀이 오래되면 거기에서 벌레가 생기게 마련이다. 쌀을 씻은 흰뜸물이 냇물을 덮어 10리 밖 요천강까지 허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귀정사에는 돈도 많아서 돈 꾸러미가 짚가리만치 쌓여 이 역시 처치난이었으며 쓰지 않은 돈은 녹이 슬어 귀정사에서 나온 돈을 받아갈 사람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귀정사의 승려들은 해묵은 쌀과 녹슬은 돈으로 인하여 모이면 한숨을 지었다.
“우리는 언제 새 쌀을 먹어보고 죽을까?”
“지금 먹고 있는 게 10년 전 쌀이라니 올해 거둔 쌀은 10년이나 뒤에 먹어야 하지 않아? 그러니 새 쌀을 먹고 죽기란 엄두도 내지 못할거야.”
승려들이 이렇게 한 마디씩 한숨 지어 말할 때 어느 날 낯선 도사가 나타나
“듣거라. 너희들이 묵은 쌀을 먹지 않고 새 쌀을 먹으려면 아주 쉬운 일이 있느니라. 대웅전 뜰 아래로 한단만 내려지으면 새 쌀을 먹게 되고 돈을 쓰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승려들은 도사의 말씀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리하여 대웅전을 옮겨지었는데 몇 년 뒤 묵은 쌀은 차츰 줄어들고 그 때부터 완전히 새 쌀을 먹게 되었으며, 돈은 누구에게 도둑 맞음도 아니요, 어느 누가 낭비함도 아닌데 차츰 줄어져 그때부터는 오히려 쌀도 딸리고 용돈도 궁할 지경에 이르렀다.
출전 : 남원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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