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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설화 호성암(虎成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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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886회 작성일 11-08-1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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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암(虎成庵)

1) 호랑이와의 인연

용성지에 의하면 호성암은 대산면 풍악산 동쪽 기슭에 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사매면 서도리 뒷산 노적봉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남원 산천을 두루 구경을 하다가 하루는 사동방의 한 산골짜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수도의 길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흔 경치를 구경하게 되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풍경이 어울리겠구나.” 하고 혼자서 탄복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가운데 노적봉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나타나 도승 앞에 꿇어 엎드리지 아니한가? 그는 자즈러지게 놀랐다. 그러나 그는 속세를 떠나 절에서만 사는 나를 설마한들 헤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태연하게 호랑이를 대하였다.

도승은 호랑이를 향하여 조용히 말하였다.

“너는 어이하여 절에 홀로 사는 중을 해치려 하느냐?”

이렇게 말을 하자 호랑이는 벌려있는 입을 더한층 크게 벌리고 스님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 머리를 몇 번이고 숙는 것이었다. 그는 호랑이가 자기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소원한 바가 있음을 짐작하고 호랑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벌리고 있는 입안을 살펴보았다. 호랑이는 그 때 입을 더욱 크게 버려 도승에게 보였다. 도승이 호랑이의 입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금니 깊숙한 곳에 뼈가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도승은 그제야 깨닫고

“너 이 고기 뼈를 빼달라는 것이 아니냐?”

하고 물으니 호랑이는 애원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럼 잠깐만 참아라. 곧 그 뼈를 빼내 줄테니.”

그는 법장과 손에 든 염주를 왼쪽 손으로 몰아 쥐고 바른 팔 옷소매를 걷어 올린 다음 호랑이에게 다가서서 손을 호랑이의 입 속에 넣고 어금니에 깊이 박힌 뼈를 빼어냈다. 호랑이는 그제야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일어서서 도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절을 하여 보였다. 그 뒤 호랑이는 번개같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도승은

“내가오늘 좋은 일을 하였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다시 절묘하게 생긴 주위풍치를 돌아보며 또 걷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밤이었다. 어제 만난 호랑이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도승 앞에 꿇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호랑이는 산돼지를 물고 있다가 땅에 내려놓고

“어제 도승님이 저의 고통을 없애주신 은혜를 갚기 위하여 이 산돼지 한 마리를 바치오니 거두어 주옵소서.”

라 하듯 머리를 숙여 보이고 사라지려 하였다. 그러나 도승은 고개를 가로저어 이를 거절하였다.

“네 정성은 기특하다만 중이란 살생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않는 법이니라. 이 산돼지는 나의 소용이 될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도록 하여라.”

이에 호랑이는 미안하다는 듯 또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잠시 후에 어디론지 쏜살같이 사라졌다. 호랑이는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도승님이 즐기는 것을 잡아다가 바쳐야겠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옳지 됐어. 보아하니 스님은 홀아비로 사는 모양이니 여자를 잡아다가 드려야겠군. 여자라도 기왕이면 꽃다운 아가씨가 좋을 거야. 됐어! 됐어! 홀아비가 설마 아가씨는 거절하지 않겠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호랑이가 세 번째로 나타났다.

호랑이는 입에 물었던 것을 정성스레 땅에 내려놓곤 온간 간다 인사표시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그는 호랑이가 내려놓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이건 또 웬일인가.

“에크! 이건 처녀가 아닌가! 큰일 났군.”

처녀는 이미 호랑이에게 놀라 기절을 하여 있었다. 그는 큰 죄나 저지른 것처럼 조심조심 처녀의 몸을 안고 방에 뉘인 다음 사지를 주무르며 처녀가 깨어나길 빌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주문을 외우며 갖가지 로 아가씨를 간호하였다. 아가씨는 오래지 않아 회복하였다. 도승은 아가씨를 돌려보낼 양으로 잡히어 온 까닭을 그녀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귀가집 따님이신 모양인데 어쩌다가 호랑이에게 잡히어 왔소? 이제 호랑이는 멀리 도망하였고 여기는 내가 살고 있는 절이요. 이제 안심하고 빨리 기운을 회복하도록 하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처녀를 안심시켰다.

“스님 고맙습니다. 소저는 영남 아무 고을에 사옵는데 방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호랑이에게 업히어 왔습니다. 처음에 잠결이라 무엇인지 모르옵다가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달리는데 늦게야 호랑이에게 잡힌 줄을 깨닫고 무서움에 놀라 까무러진 것입니다. 스님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니 빨리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였다.

“어허! 듣고 보니 큰일날 뻔 하였군. 절에서 공부하는 중들은 평생토록 좋은 일만 하는 법. 우선 기운을 온전히 회복하오. 먼 길을 과년 찬 처녀가 홀로 걷는 것은 위험하니 나와 같이 떠납시다.”

이튿날 처녀를 앞세우고 도승은 그녀의 집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수일 후에 처녀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처녀의 집에서는 밤사이에 곡절 없이 잃어버리고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딸은 무남독녀이므로 금지옥엽처럼 기르는 터이다. 그리고 보니 딸을 잃어버린 그들 부모들은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며 슬퍼하는 중 그날은 마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무당을 데려다가 딸을 찾게 해달라고 크게 굿을 하는 판이었다. 이런 때에 희한하게도 딸이 어느 도승과 함께 집을 찾아 왔으니 그들의 반가움은 이를 데 없었다.

부모는 스님과 딸로부터 그동안의 경과사를 듣고 나자 다시 한 번 놀랐다.

“듣고 보니 잃어버린 딸이 살아 돌아온 것은 도승님의 끼치신 은덕으로 생각합니다.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심이나 다름없는 스님의 높은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좋은지요? 철없고 못난 딸 때문에 여러 날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집안은 누추하오나 며칠만 푹 쉬어가시면 더없이 큰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고 그녀의 부모는 진심으로 스님에게 고마움을 아뢰었다. 그들 부모들은 물론이요, 아가씨도 몇 번이고 간청하므로 도승은 할 수 없이 며칠을 그녀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떠날 날이 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다시 스님에게 여쭈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딸자식을 구해 주신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제가 가진 재산을 그동안 절반을 정리하여 약간의 은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저의 소원이오니 많지 않은 돈이지만 이것으로 저의 딸 시주품이라 생각하시고 조그마한 성의나마 부처님 전에 바쳐주시기 바랍니다. 돈을 싣고 갈 말은 이미 준비가 되었사오며 스님을 모시고 가도록 대령하여 있습니다.”

하고 공손히 여쭈었다.

“우연한 인연이 있어 대가집 따님에게 끼친 공으로 이토록 많은 시주를 주시니 오히려 과부합니다. 그 정성은 불전에 어김없이 올리겠거니와 생각하면 일은 소승이 호랑이로 말미암아 얻어진 시주라 할 것인 바, 그 호랑이를 만난 자리에 절을 세워 이름을 호성암이라 불을까 하오.”

도승은 아가씨의 집에서 얻은 막대한 시주로 절을 지으니 이것이 노적봉에 있는 ‘호성암’이 되었다. 불행히도 후에 화재를 입어 지금은 전하지 않고 다만 암벽에 새겨진 석불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출전 : 남원군지

2) 떡 잔치 이야기

호성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 절의 중들은 해마다 5월 단오절이면 떡을 만들어 잔치를 하게 되었다. 떡을 만들면 먼저 불전에 올리고 불공을 드리기는 하나 그 떡은 결국 중들이 먹기 마련이다. 이 때 호성암은 규모가 컸음인지 승려가 무려 20~3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 많은 중들이 서로 욕심이 많아서 떡을 한 개라도 더 먹으려고 수선 법석을 떠는 것이 탈이었다. 그리고 떡을 나누어 먹되 낮에 떡 잔치를 벌이면 절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까운 떡이 줄어져 중들의 차지가 적어질 것이 염려되므로 손님들이 한 사람도 없을 때에 떡 잔치를 벌일 필요가 있어 떡 잔치를 항상 밤중에 벌이도록 되어 있었다. 몇 해 동안은 비밀리에 떡 잔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새어나갔는지 산 밑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더구나 젊은 중들은 떡을 갈라 먹되 한 개라도 더 차지하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리하여 중들은 똑같이 떡을 공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은 방법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방법을 생각한 나머지 떡을 저울로 달아 나누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농사철에 비가 오면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물싸움이 일어나면

“우리도 호성암 중들 떡 달듯 할까?”

하는 말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마을에 퍼지자 호성암 스님들도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로는 단오날 잔치에 떡을 다는 노릇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서로 의좋게 불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출전 : 남원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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