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황산대첩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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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우리민족사에서 왜침이 가장 많았던 시기로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대규모화 해졌으며 횡포 또한 잔인해졌다. 1376년(우왕 4년) 5월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왜군이 대거 침입하였는데, 1376년 7월에는 공주를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 최영장군에 의하여 홍산에서 크게 패하여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전주지방으로 다시 침입하여 약탈과 방화, 살인 등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었으며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이성계장군을 삼도통사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남원은 산세가 준험하고 골마다 물이 좋아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성계 장군과 여진출신 의동생 이두란이 삼남을 휩쓸고 노략질을 하는 왜구의 괴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아군보다 10배가 많은 왜구를 남원 황산협곡에서 섬멸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황산대첩이라 부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조 10년 (1577년)에 화수리 강변에다 기념비를 세웠다. 이 대첩은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1945년 1월 일제의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하여 일제 경찰이 비문을 완전히 마멸시킨 뒤 비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조국광복이후 폭파당시 흩어졌던 파편들을 주워 모아 화수리에 황산대첩비각을 재건하여 민족의 웅비와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유래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피바위, 인월, 군마동, 인풍리 등이다. 피바위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변에 있는데 당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것이며, 인월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쫓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이에 유래하였고, 인풍은 이성계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있고,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 놓은 곳이라 하여 군마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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